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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왜 그랬을까? 9탄 — 운동회와 소풍이 온 가족의 큰 행사였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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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학교 운동회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학교에 따라 가족이 참여하는 행사로 진행하기도 하고, 학생들만 참여하는 체육대회 형식으로 열기도 한다. 하지만 1960~70년대 국민학교 시절의 운동회는 마을 사람들까지 관심을 갖는 큰 행사였다. 소풍 역시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특별한 날이었다. 평소에는 먹기 어려웠던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교실을 벗어나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국민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운동회 날 어머니와 함께 먹었던 김밥, 소풍날 가져갔던 찐빵과 사이다 한 병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만국기가 펄럭이던 가을 운동회 그 시절 운동회는 학교의 큰 행사였다.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걸리고 청군과 백군으로 나뉜 아이들이 다양한 경기에 참여했다. 달리기와 줄다리기, 장애물 경기 등 여러 종목이 진행됐고, 아이들은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친구들을 응원했다. 부모님과 가족들도 학교를 찾아와 아이들이 경기에 참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운동회는 학생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날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다양한 놀이시설이나 여가 활동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학교 운동회는 더욱 특별한 행사였다. 100m 달리기는 25초, 장애물 경기는 1등 나는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잘하지 못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체력장에서 100m를 달린 기록이 무려 25초였다. 그러니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면 늘 꼴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래달리기나 장애물 경기에서는 달랐다. 숟가락에 공을 얹고 달리거나 사다리를 통과하는 것처럼 무조건 빨리 달리기보다 요령과 판단력이 필요한 경기에서는 1등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순발력이나 달리기 실력보다는 지구력과 요령이 필요한 경기에 더 강했던 것 같다. 모든 아이가 달리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 잘할 수 있는 경기가 있다는 점에서 운동회는 나름대로 재미있는 행사였다. 운동회 날 어머니와 함께 먹었던 김밥 운동회에서 경기만큼이나 기다려졌던 시...

그때는 왜 그랬을까? 8탄 — 손톱검사와 머릿니검사를 학교에서 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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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손톱검사를 했다”고 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머릿니가 있는지 친구들끼리 서로 머리를 들춰보며 살펴봤다고 하면 더 놀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공부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예방접종도 학교에서 하고, 회충약도 먹고, 손톱이 깨끗한지 머리에 이가 있는지까지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학교에서 이런 것까지 했나?’ 싶지만 그때는 그게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월요일 아침이면 손부터 내밀었다 내 기억으로는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마다 손톱검사를 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아이들의 손을 보면서 손톱이 너무 길지는 않은지, 손톱 밑에 때가 끼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이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고 손톱을 보여줬던 기억이 있다. 검사에 걸리면 어떻게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손톱을 깎아오라고 했는지, 선생님에게 한마디를 들었는지 그 부분은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학교에서 손톱검사를 했다는 사실 자체는 또렷하게 남아 있다. 지금은 손톱을 깎는 것이 개인이나 가정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만, 그때는 학교에서도 아이들의 기본적인 위생 상태를 확인했던 것이다. 친구 머리를 한참 들여다보던 아이들 머릿니 검사도 했던 기억이 있다. 다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검사했는지는 기억이 조금 흐릿하다. 선생님이 아이들의 머리를 일일이 직접 검사했다기보다는 친구들끼리 서로 머리카락을 들춰보면서 확인했던 것 같다. 이는 머리카락을 한 번 슬쩍 본다고 바로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이쪽저쪽으로 가르면서 한참 들여다봐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의 머리를 가까이 들여다보며 머리카락 사이를 살펴보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요즘 생각하면 친구끼리 머리를 들춰가며 이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참 낯설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 머릿니가 흔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아주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촘촘한 참빗이 있던 집 그 시절 집에는 참빗 이...

그때는 왜 그랬을까? 7탄 — 한 반에 60명이 넘었던 콩나물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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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학교 교실 사진을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교실이 참 넓어졌구나.’ 교실 자체가 커졌다기보다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수가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한 반에 60명이 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도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많은 아이들이 어떻게 한 교실에 다 들어가서 공부했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학교생활이었다. 시골 학교도 한 반에 60명이 넘었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는 시골의 작은 학교였다. 한 학년에 반도 하나뿐이었다. 1반, 2반, 3반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학년 아이들이 모두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고, 그 한 반에 60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다. 교실에 들어가면 책상이 앞에서부터 뒤까지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많은 아이들이 어떻게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많은 아이들을 선생님 한 분이 가르쳤고, 우리도 그것을 당연한 학교생활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시절의 교실을 두고 흔히 **‘콩나물 교실’**이라고 불렀다. 콩나물시루에 콩나물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듯, 한 교실을 60명이 넘는 아이들이 가득 채우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한 분이 그 많은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보다 선생님이 더 대단했다는 생각도 든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외우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60명이 넘는 아이들의 숙제를 확인하고 시험지를 나눠주고 걷고, 떠드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면서 수업까지 해야 했다. 출석을 부르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우리는 선생님 한 분을 바라보며 함께 국어를 배우고 산수를 풀고 책을 읽었다. 칠판 하나와 선생님 한 분, 그리고 교실을 가득 채운 아이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국민학교 교실의 모습이다. 내 학교에는 오전반·오후반은 없었다 학생 수가 많았던 당시 학교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실이 부족해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

그때는 왜 그랬을까? 6탄 — 난로 위 도시락과 동상, 그 시절 겨울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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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학교 교실은 겨울이 되어도 난방이 잘된다. 아이들은 두꺼운 외투를 벗고 수업을 하고, 점심시간이면 따뜻한 급식을 먹는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겨울 교실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교실에는 난로가 있었지만 난로 하나가 넓은 교실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더구나 우리 반에는 학생이 70명 가까이 있었다. 겨울이면 난로 주변으로 아이들이 모였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난로 위에는 도시락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시절 겨울 교실을 생각하면 나는 따뜻한 난로보다 먼저 난로 위에 쌓여 있던 도시락과 차갑게 식은 밥 , 그리고 겨울마다 동상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학생은 70명, 난로는 하나였다 우리 반에는 학생이 70명 가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 교실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함께 공부했을까 싶다. 겨울에는 교실에 난로를 피웠지만 난로 가까운 곳과 멀리 떨어진 곳의 온도 차이도 컸다. 난로 가까이에 있으면 따뜻했지만 조금만 멀어지면 추웠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 난로는 또 다른 역할을 했다. 바로 도시락을 데우는 일이었다. 난로 위에 도시락을 쌓아 데워 먹던 아이들 그 시절에는 학교 급식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겨울이면 아침에 따뜻한 밥을 도시락에 담아 와도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래서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데워 먹는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반 학생이 70명 가까이 되는데 그 많은 도시락을 난로 하나에 모두 올려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난로 앞쪽에 있는 아이들이 주로 도시락을 올려놓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차갑게 식은 도시락을 그냥 먹었다. 나도 겨울에 찬밥을 먹었던 기억이 많다. 지금은 추운 날 따뜻한 밥을 먹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때는 겨울에 찬 도시락을 먹는 것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한 반에 한두 명뿐이었던 보온도시락 그래도 한 반에 한두 명 정도는 보온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나 보온도시락을 가지고 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5탄 — 회충약부터 불주사까지, 예방접종도 학교에서 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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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예방접종 일정을 챙긴다. 언제 무슨 예방접종을 해야 하는지 확인하고, 시기가 되면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이나 보건소에 간다. 어떤 예방접종을 언제 했는지도 기록으로 남으니 다음 접종 시기를 확인하기도 어렵지 않다. 그런 모습을 보면 가끔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런데 우리는 예방접종을 언제, 어디서 맞았더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어릴 때 예방접종을 맞으러 부모님과 병원에 갔던 기억이 없다. 병원도 없는 첩첩산골에서 살았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예방접종은 모두 학교에서 맞았던 주사 다. 예방접종도 학교에서 하던 시절 그 시절 학교에서는 신체검사를 했다. 키와 몸무게를 재고 시력도 검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예방접종도 학교에서 했다. 아이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한 명씩 주사를 맞았다. 몇 학년 때 무슨 주사를 맞았는지, 1년에 한 번씩 맞았는지 몇 년에 한 번씩 맞았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그때는 무슨 주사를 왜 맞는지 어린 우리가 자세히 알지도 못했다. 학교에서 맞으라고 하니까 맞았던 것이다. 주사를 무서워해서 울던 아이도 있었을 것이고, 겁이 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부모가 예방접종 일정을 하나하나 챙기는 모습과는 참 달랐다. 아직도 왼쪽 어깨에 남아 있는 불주사 자국 그때 맞았던 주사 가운데 지금까지 흔적을 남긴 것이 있다. 바로 우리가 흔히 ‘불주사’라고 불렀던 예방접종 이다. 내 왼쪽 어깨에는 지금도 그때 생긴 흉터가 남아 있다. 어릴 때 맞은 주사인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국이 남아 있으니, 어떻게 보면 내 몸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흔적 하나인 셈이다. 요즘은 예방접종 방법도 달라졌고 접종 기록도 체계적으로 관리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내 어깨에 남아 있는 불주사 자국이 새삼 옛날 흔적처럼 느껴진다. 회충약도 학교에서 챙기던 시절 학교에서 아이들의 건강을 챙긴 것은 예방접종만이 아니었다. 회충과 기생충도 그 시절에는 아주...

그때는 왜 그랬을까? 4탄 — 쥐꼬리와 퇴비까지 학교에 가져가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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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을까? “학교에 퇴비 한 단을 가져갔어.” 그것만 해도 이상하게 들릴 텐데, 더 놀라운 것도 있었다. 잡은 쥐의 꼬리를 잘라 학교에 가져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공부하러 가는 학교에 왜 풀을 한 단씩 들고 가고, 쥐꼬리까지 가져갔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때는 그저 선생님이 가져오라고 하니까 가져갔다.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에야 궁금해진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내일까지 퇴비 한 단씩 가져오세요” 학교에서 가끔 퇴비 한 단을 가져오라는 숙제 를 내줬다. 그런데 나는 퇴비가 뭔지 몰랐다. 우리 집은 농사를 전문으로 짓는 집이 아니었다. 엄마의 바느질로 우리 가족이 먹고살았기 때문에 나는 농사일이나 농사에 쓰는 것들을 잘 알지 못했다. 선생님이 “퇴비 한 단”이라고 해도 어린 나에게는 도대체 뭘 가져오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숙제를 안 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가져오는 것을 보고 따라 했다. 친구들이 풀 같은 것을 한 단씩 묶어서 가져오기에 나도 비슷하게 했다. 풀 사이에 작은 나무 같은 것도 조금 섞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왜 퇴비인지도 몰랐다. 그저 친구들 것을 보고, ‘아, 이런 걸 가져가는 건가 보다.’ 하고 한 단을 만들어 학교에 가져갔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퇴비가 뭔지도 모르면서 퇴비를 가져갔으니 말이다. 우리가 가져간 것은 완성된 퇴비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퇴비 한 단’이라는 말부터 이상하다. 완성된 퇴비라면 한 포대, 한 자루라고 했을 텐데 우리는 분명 **‘한 단’**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퇴비 생산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풀을 베어 모아 퇴비를 만드는 일도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말한 ‘퇴비 한 단’은 이미 썩혀서 만들어진 거름을 가져오라는 것이 아니라 퇴비를 만드는 데 사용할 풀이나 잡초 같...

그때는 왜 그랬을까? 3탄 — 학교에서 폐품을 모아 오라고 하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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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에게 “내일까지 집에 있는 폐품을 모아서 학교에 가져가라”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학교에서 왜 그런 걸 가져오라고 하느냐고 먼저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폐품을 모아 오라고 하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공부하러 간 아이들이 왜 집집마다 빈 병을 찾아 학교에 가져갔을까 싶다. 폐품을 학교에 가져가던 아이들 그 시절 학교에서는 폐품을 모아 오라는 말을 종종 했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모으는 물건은 달랐겠지만 빈 병이나 고철, 헌 종이처럼 다시 쓸 수 있거나 팔 수 있는 물건들이 폐품수집의 대상이 됐다. 1970년대에는 절약과 저축, 자원 활용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강했다. 새마을운동 역시 농촌에서 시작해 도시와 직장, 학교 등으로 확대됐고 폐품수집도 당시 여러 생활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폐품을 모으는 일도 단순히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아니라 아껴 쓰고 다시 활용하자는 시대 분위기와 맞닿아 있었다. 깡시골에는 가져갈 폐품도 많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곳은 아주 깊은 시골이었다. 폐품을 가져오라고 해도 사실 집에서 찾아낼 만한 물건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신문을 보는 집도 흔하지 않았고, 종이 자체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집집마다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던 때였고, 지금처럼 화장지를 넉넉하게 사서 쓰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집에 생긴 종이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화장지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광고 전단지며 택배 상자며 종이가 넘쳐나지만, 그때는 종이 한 장도 그렇게 쓸모가 있었다. 그러니 학교에서 폐품을 모아 오라고 해도 헌 신문이나 종이를 한 아름씩 가져갈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폐품수집에서 가장 수월했던 것은 빈 병 이었다. 집 안팎을 둘러보다 빈 병이 있으면 챙겨두었다가 학교에 가져갔다. 요즘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이다. 지금은 버릴 것이 너무 많아서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 고민인데, 그때는 학교에서 폐품을 가져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