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왜 그랬을까? 4탄 — 쥐꼬리와 퇴비까지 학교에 가져가던 시절

 요즘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을까?

“학교에 퇴비 한 단을 가져갔어.”

그것만 해도 이상하게 들릴 텐데, 더 놀라운 것도 있었다.

잡은 쥐의 꼬리를 잘라 학교에 가져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공부하러 가는 학교에 왜 풀을 한 단씩 들고 가고, 쥐꼬리까지 가져갔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때는 그저 선생님이 가져오라고 하니까 가져갔다.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에야 궁금해진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내일까지 퇴비 한 단씩 가져오세요”

학교에서 가끔 퇴비 한 단을 가져오라는 숙제를 내줬다.


그런데 나는 퇴비가 뭔지 몰랐다.

우리 집은 농사를 전문으로 짓는 집이 아니었다.
엄마의 바느질로 우리 가족이 먹고살았기 때문에 나는 농사일이나 농사에 쓰는 것들을 잘 알지 못했다.

선생님이 “퇴비 한 단”이라고 해도 어린 나에게는 도대체 뭘 가져오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숙제를 안 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가져오는 것을 보고 따라 했다.

친구들이 풀 같은 것을 한 단씩 묶어서 가져오기에 나도 비슷하게 했다. 풀 사이에 작은 나무 같은 것도 조금 섞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왜 퇴비인지도 몰랐다.

그저 친구들 것을 보고,

‘아, 이런 걸 가져가는 건가 보다.’

하고 한 단을 만들어 학교에 가져갔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퇴비가 뭔지도 모르면서 퇴비를 가져갔으니 말이다.

우리가 가져간 것은 완성된 퇴비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퇴비 한 단’이라는 말부터 이상하다.

완성된 퇴비라면 한 포대, 한 자루라고 했을 텐데 우리는 분명 **‘한 단’**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퇴비 생산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풀을 베어 모아 퇴비를 만드는 일도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말한 ‘퇴비 한 단’은 이미 썩혀서 만들어진 거름을 가져오라는 것이 아니라 퇴비를 만드는 데 사용할 풀이나 잡초 같은 재료를 한 단씩 묶어 가져오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친구들을 보고 풀과 작은 나무가 섞인 것을 가져갔던 기억도 이제야 이해가 된다.

어린 나는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당시의 퇴비 증산에 참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새마을운동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몰랐다.

우리가 왜 풀을 베어 학교에 가져가야 하는지, 왜 학생들에게까지 그런 일을 시키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 시대를 돌아보면 우리가 학교에서 했던 여러 활동은 당시 국가적으로 추진되던 농촌의 생산 증대와 생활개선 정책, 그리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면 흔히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마을길을 넓히는 모습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농촌의 소득을 높이고 식량 생산을 늘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고, 퇴비 증산 역시 당시 장려됐던 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학교에서도 새마을교육이 이루어지고 근검절약, 환경개선, 노력봉사 등 여러 활동에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런 시대였으니 학생들에게 퇴비를 만들 풀 한 단씩을 가져오게 하는 것도 당시에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선생님이 내준 숙제라고 생각하고 풀 한 단을 들고 학교에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시대의 한가운데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 쥐꼬리도 가져갔다

퇴비보다 지금 생각하면 더 놀라운 것이 있다.

바로 쥐꼬리다.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집에서 쥐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쌀이나 곡식을 보관하는 곳에도 쥐가 나타났고, 집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갉아먹기도 했다.

쥐가 곡식을 먹어 치우는 피해도 컸고 위생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쥐잡기 운동이 벌어졌다.

쥐잡기 운동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실시됐기 때문에 모든 쥐잡기 활동을 새마을운동의 하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1970년대에는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농촌의 피해를 줄이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쥐잡기 역시 계속됐다.

그리고 그 일에 학교와 학생들도 참여했다.

쥐꼬리를 자르는 건 남동생 몫이었다

우리 집에도 쥐틀을 놓았다.

나는 쥐를 손으로 만지는 일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내 남동생은 달랐다.

동생은 그런 것에 겁이 없었다.

쥐틀에 쥐가 잡히면 쥐를 손으로 만지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에 가져가기 위해 잡힌 쥐의 꼬리를 직접 잘랐다.

그렇게 잘라낸 쥐꼬리를 학교에 가져갔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도저히 못 할 일이다.

어떻게 쥐를 맨손으로 만지고 꼬리까지 잘랐을까 싶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지금 아이들에게

“옛날에는 학교에 쥐꼬리를 가져갔단다.”

라고 하면 아마 믿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

그런데 왜 하필 쥐꼬리였을까?

이유를 알고 보면 간단하다.

쥐를 잡았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증거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죽은 쥐를 통째로 학교에 가져오게 할 수는 없으니 잡은 쥐의 수를 확인하기 위해 꼬리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지금의 위생 관념으로 생각하면 어린 학생들이 쥐꼬리를 학교에 가져갔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하지만 당시에는 쥐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어른들만 쥐를 잡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여를 독려했고, 학교가 가정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그 시절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학교에서 했던 일은 참 많았다.

책을 읽고 국어와 산수를 배우는 것만이 학교생활의 전부가 아니었다.

폐품을 가져오기도 했고, 퇴비를 만들 풀도 가져갔다.

쥐잡기 운동을 할 때는 쥐꼬리까지 가져갔다.

그 시절 학교는 지금보다 나라에서 추진하는 여러 정책과 사회운동을 가정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학생이 학교에서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전달하면 결국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하게 됐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이걸 왜 학교에서 했을까?’ 싶은 일들이 당시에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 했다

나는 퇴비가 뭔지도 몰랐다.

친구들이 풀을 가져오니까 나도 풀을 가져갔다.

남동생은 쥐틀에 잡힌 쥐의 꼬리를 잘라 학교에 가져갔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가져오라고 했으니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그 작은 기억 하나하나가 모두 그 시대의 생활 모습이었다.

농업 생산량을 늘리려고 퇴비를 만들던 시대.

쥐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고 온 국민이 쥐잡기에 나섰던 시대.

그리고 그런 국가적인 움직임에 어린 학생들까지 자연스럽게 참여했던 시대였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친구들을 따라 풀 한 단을 들고 학교에 갔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풀 한 단에도 당시 우리 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때는 당연했던 일이 지금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오래된 기억을 하나씩 꺼내볼 때마다 다시 묻게 된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옛날에는 정말 학생들이 학교에 쥐꼬리를 가져갔나요?

네. 과거에는 쥐로 인한 곡식 피해와 위생 문제를 줄이기 위해 전국적인 쥐잡기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학생과 학교도 참여했으며, 실제로 쥐를 잡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쥐꼬리를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Q2. 왜 쥐 전체가 아니라 꼬리만 가져갔나요?

잡은 쥐의 수를 확인하기 위한 증거로 꼬리를 이용했습니다. 죽은 쥐를 통째로 모으는 것보다 보관과 수량 확인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Q3. ‘퇴비 한 단’은 완성된 퇴비를 가져오라는 말이었나요?

아닙니다. 당시 말하던 ‘퇴비 한 단’은 완성된 거름 한 단이라는 뜻이 아니라, 퇴비를 만드는 데 사용할 풀이나 잡초 등을 베어 한 단으로 묶어 가져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Q4. 퇴비를 학교에 가져간 것도 새마을운동과 관련이 있었나요?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서는 농촌 환경개선뿐 아니라 농업 생산 증대와 퇴비 증산도 강조됐습니다. 학교에서도 새마을교육과 여러 실천 활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시 학생들의 퇴비 수집 역시 이런 시대적 흐름과 연결해서 볼 수 있습니다.

Q5. 쥐잡기 운동도 새마을운동 때문에 시작된 것인가요?

그것은 아닙니다. 전국적인 쥐잡기 운동은 새마을운동 이전부터 실시됐습니다. 이후에도 농작물 피해 방지와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계속됐기 때문에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 시기와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Q6. 왜 당시에는 학생들이 이런 사회운동에 많이 참여했나요?

당시 학교는 교육기관인 동시에 국가의 생활개선·증산·절약 정책 등을 가정에 전달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래서 폐품수집이나 쥐잡기, 퇴비 증산 등 오늘날에는 학교 숙제로 생각하기 어려운 활동에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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