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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왜 그랬을까? 9탄 — 운동회와 소풍이 온 가족의 큰 행사였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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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학교 운동회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학교에 따라 가족이 참여하는 행사로 진행하기도 하고, 학생들만 참여하는 체육대회 형식으로 열기도 한다. 하지만 1960~70년대 국민학교 시절의 운동회는 마을 사람들까지 관심을 갖는 큰 행사였다. 소풍 역시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특별한 날이었다. 평소에는 먹기 어려웠던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교실을 벗어나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국민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운동회 날 어머니와 함께 먹었던 김밥, 소풍날 가져갔던 찐빵과 사이다 한 병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만국기가 펄럭이던 가을 운동회 그 시절 운동회는 학교의 큰 행사였다.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걸리고 청군과 백군으로 나뉜 아이들이 다양한 경기에 참여했다. 달리기와 줄다리기, 장애물 경기 등 여러 종목이 진행됐고, 아이들은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친구들을 응원했다. 부모님과 가족들도 학교를 찾아와 아이들이 경기에 참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운동회는 학생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날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다양한 놀이시설이나 여가 활동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학교 운동회는 더욱 특별한 행사였다. 100m 달리기는 25초, 장애물 경기는 1등 나는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잘하지 못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체력장에서 100m를 달린 기록이 무려 25초였다. 그러니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면 늘 꼴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래달리기나 장애물 경기에서는 달랐다. 숟가락에 공을 얹고 달리거나 사다리를 통과하는 것처럼 무조건 빨리 달리기보다 요령과 판단력이 필요한 경기에서는 1등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순발력이나 달리기 실력보다는 지구력과 요령이 필요한 경기에 더 강했던 것 같다. 모든 아이가 달리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 잘할 수 있는 경기가 있다는 점에서 운동회는 나름대로 재미있는 행사였다. 운동회 날 어머니와 함께 먹었던 김밥 운동회에서 경기만큼이나 기다려졌던 시...

그때는 왜 그랬을까? 8탄 — 손톱검사와 머릿니검사를 학교에서 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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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손톱검사를 했다”고 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머릿니가 있는지 친구들끼리 서로 머리를 들춰보며 살펴봤다고 하면 더 놀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공부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예방접종도 학교에서 하고, 회충약도 먹고, 손톱이 깨끗한지 머리에 이가 있는지까지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학교에서 이런 것까지 했나?’ 싶지만 그때는 그게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월요일 아침이면 손부터 내밀었다 내 기억으로는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마다 손톱검사를 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아이들의 손을 보면서 손톱이 너무 길지는 않은지, 손톱 밑에 때가 끼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이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고 손톱을 보여줬던 기억이 있다. 검사에 걸리면 어떻게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손톱을 깎아오라고 했는지, 선생님에게 한마디를 들었는지 그 부분은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학교에서 손톱검사를 했다는 사실 자체는 또렷하게 남아 있다. 지금은 손톱을 깎는 것이 개인이나 가정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만, 그때는 학교에서도 아이들의 기본적인 위생 상태를 확인했던 것이다. 친구 머리를 한참 들여다보던 아이들 머릿니 검사도 했던 기억이 있다. 다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검사했는지는 기억이 조금 흐릿하다. 선생님이 아이들의 머리를 일일이 직접 검사했다기보다는 친구들끼리 서로 머리카락을 들춰보면서 확인했던 것 같다. 이는 머리카락을 한 번 슬쩍 본다고 바로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이쪽저쪽으로 가르면서 한참 들여다봐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의 머리를 가까이 들여다보며 머리카락 사이를 살펴보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요즘 생각하면 친구끼리 머리를 들춰가며 이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참 낯설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 머릿니가 흔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아주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촘촘한 참빗이 있던 집 그 시절 집에는 참빗 이...

그때는 왜 그랬을까? 7탄 — 한 반에 60명이 넘었던 콩나물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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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학교 교실 사진을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교실이 참 넓어졌구나.’ 교실 자체가 커졌다기보다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수가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한 반에 60명이 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도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많은 아이들이 어떻게 한 교실에 다 들어가서 공부했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학교생활이었다. 시골 학교도 한 반에 60명이 넘었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는 시골의 작은 학교였다. 한 학년에 반도 하나뿐이었다. 1반, 2반, 3반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학년 아이들이 모두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고, 그 한 반에 60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다. 교실에 들어가면 책상이 앞에서부터 뒤까지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많은 아이들이 어떻게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많은 아이들을 선생님 한 분이 가르쳤고, 우리도 그것을 당연한 학교생활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시절의 교실을 두고 흔히 **‘콩나물 교실’**이라고 불렀다. 콩나물시루에 콩나물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듯, 한 교실을 60명이 넘는 아이들이 가득 채우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한 분이 그 많은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보다 선생님이 더 대단했다는 생각도 든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외우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60명이 넘는 아이들의 숙제를 확인하고 시험지를 나눠주고 걷고, 떠드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면서 수업까지 해야 했다. 출석을 부르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우리는 선생님 한 분을 바라보며 함께 국어를 배우고 산수를 풀고 책을 읽었다. 칠판 하나와 선생님 한 분, 그리고 교실을 가득 채운 아이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국민학교 교실의 모습이다. 내 학교에는 오전반·오후반은 없었다 학생 수가 많았던 당시 학교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실이 부족해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

그때는 왜 그랬을까? 6탄 — 난로 위 도시락과 동상, 그 시절 겨울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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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학교 교실은 겨울이 되어도 난방이 잘된다. 아이들은 두꺼운 외투를 벗고 수업을 하고, 점심시간이면 따뜻한 급식을 먹는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겨울 교실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교실에는 난로가 있었지만 난로 하나가 넓은 교실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더구나 우리 반에는 학생이 70명 가까이 있었다. 겨울이면 난로 주변으로 아이들이 모였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난로 위에는 도시락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시절 겨울 교실을 생각하면 나는 따뜻한 난로보다 먼저 난로 위에 쌓여 있던 도시락과 차갑게 식은 밥 , 그리고 겨울마다 동상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학생은 70명, 난로는 하나였다 우리 반에는 학생이 70명 가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 교실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함께 공부했을까 싶다. 겨울에는 교실에 난로를 피웠지만 난로 가까운 곳과 멀리 떨어진 곳의 온도 차이도 컸다. 난로 가까이에 있으면 따뜻했지만 조금만 멀어지면 추웠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 난로는 또 다른 역할을 했다. 바로 도시락을 데우는 일이었다. 난로 위에 도시락을 쌓아 데워 먹던 아이들 그 시절에는 학교 급식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겨울이면 아침에 따뜻한 밥을 도시락에 담아 와도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래서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데워 먹는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반 학생이 70명 가까이 되는데 그 많은 도시락을 난로 하나에 모두 올려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난로 앞쪽에 있는 아이들이 주로 도시락을 올려놓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차갑게 식은 도시락을 그냥 먹었다. 나도 겨울에 찬밥을 먹었던 기억이 많다. 지금은 추운 날 따뜻한 밥을 먹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때는 겨울에 찬 도시락을 먹는 것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한 반에 한두 명뿐이었던 보온도시락 그래도 한 반에 한두 명 정도는 보온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나 보온도시락을 가지고 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5탄 — 회충약부터 불주사까지, 예방접종도 학교에서 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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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예방접종 일정을 챙긴다. 언제 무슨 예방접종을 해야 하는지 확인하고, 시기가 되면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이나 보건소에 간다. 어떤 예방접종을 언제 했는지도 기록으로 남으니 다음 접종 시기를 확인하기도 어렵지 않다. 그런 모습을 보면 가끔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런데 우리는 예방접종을 언제, 어디서 맞았더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어릴 때 예방접종을 맞으러 부모님과 병원에 갔던 기억이 없다. 병원도 없는 첩첩산골에서 살았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예방접종은 모두 학교에서 맞았던 주사 다. 예방접종도 학교에서 하던 시절 그 시절 학교에서는 신체검사를 했다. 키와 몸무게를 재고 시력도 검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예방접종도 학교에서 했다. 아이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한 명씩 주사를 맞았다. 몇 학년 때 무슨 주사를 맞았는지, 1년에 한 번씩 맞았는지 몇 년에 한 번씩 맞았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그때는 무슨 주사를 왜 맞는지 어린 우리가 자세히 알지도 못했다. 학교에서 맞으라고 하니까 맞았던 것이다. 주사를 무서워해서 울던 아이도 있었을 것이고, 겁이 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부모가 예방접종 일정을 하나하나 챙기는 모습과는 참 달랐다. 아직도 왼쪽 어깨에 남아 있는 불주사 자국 그때 맞았던 주사 가운데 지금까지 흔적을 남긴 것이 있다. 바로 우리가 흔히 ‘불주사’라고 불렀던 예방접종 이다. 내 왼쪽 어깨에는 지금도 그때 생긴 흉터가 남아 있다. 어릴 때 맞은 주사인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국이 남아 있으니, 어떻게 보면 내 몸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흔적 하나인 셈이다. 요즘은 예방접종 방법도 달라졌고 접종 기록도 체계적으로 관리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내 어깨에 남아 있는 불주사 자국이 새삼 옛날 흔적처럼 느껴진다. 회충약도 학교에서 챙기던 시절 학교에서 아이들의 건강을 챙긴 것은 예방접종만이 아니었다. 회충과 기생충도 그 시절에는 아주...

그때는 왜 그랬을까? 4탄 — 쥐꼬리와 퇴비까지 학교에 가져가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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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을까? “학교에 퇴비 한 단을 가져갔어.” 그것만 해도 이상하게 들릴 텐데, 더 놀라운 것도 있었다. 잡은 쥐의 꼬리를 잘라 학교에 가져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공부하러 가는 학교에 왜 풀을 한 단씩 들고 가고, 쥐꼬리까지 가져갔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때는 그저 선생님이 가져오라고 하니까 가져갔다.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에야 궁금해진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내일까지 퇴비 한 단씩 가져오세요” 학교에서 가끔 퇴비 한 단을 가져오라는 숙제 를 내줬다. 그런데 나는 퇴비가 뭔지 몰랐다. 우리 집은 농사를 전문으로 짓는 집이 아니었다. 엄마의 바느질로 우리 가족이 먹고살았기 때문에 나는 농사일이나 농사에 쓰는 것들을 잘 알지 못했다. 선생님이 “퇴비 한 단”이라고 해도 어린 나에게는 도대체 뭘 가져오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숙제를 안 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가져오는 것을 보고 따라 했다. 친구들이 풀 같은 것을 한 단씩 묶어서 가져오기에 나도 비슷하게 했다. 풀 사이에 작은 나무 같은 것도 조금 섞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왜 퇴비인지도 몰랐다. 그저 친구들 것을 보고, ‘아, 이런 걸 가져가는 건가 보다.’ 하고 한 단을 만들어 학교에 가져갔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퇴비가 뭔지도 모르면서 퇴비를 가져갔으니 말이다. 우리가 가져간 것은 완성된 퇴비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퇴비 한 단’이라는 말부터 이상하다. 완성된 퇴비라면 한 포대, 한 자루라고 했을 텐데 우리는 분명 **‘한 단’**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퇴비 생산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풀을 베어 모아 퇴비를 만드는 일도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말한 ‘퇴비 한 단’은 이미 썩혀서 만들어진 거름을 가져오라는 것이 아니라 퇴비를 만드는 데 사용할 풀이나 잡초 같...

그때는 왜 그랬을까? 3탄 — 학교에서 폐품을 모아 오라고 하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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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에게 “내일까지 집에 있는 폐품을 모아서 학교에 가져가라”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학교에서 왜 그런 걸 가져오라고 하느냐고 먼저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폐품을 모아 오라고 하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공부하러 간 아이들이 왜 집집마다 빈 병을 찾아 학교에 가져갔을까 싶다. 폐품을 학교에 가져가던 아이들 그 시절 학교에서는 폐품을 모아 오라는 말을 종종 했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모으는 물건은 달랐겠지만 빈 병이나 고철, 헌 종이처럼 다시 쓸 수 있거나 팔 수 있는 물건들이 폐품수집의 대상이 됐다. 1970년대에는 절약과 저축, 자원 활용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강했다. 새마을운동 역시 농촌에서 시작해 도시와 직장, 학교 등으로 확대됐고 폐품수집도 당시 여러 생활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폐품을 모으는 일도 단순히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아니라 아껴 쓰고 다시 활용하자는 시대 분위기와 맞닿아 있었다. 깡시골에는 가져갈 폐품도 많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곳은 아주 깊은 시골이었다. 폐품을 가져오라고 해도 사실 집에서 찾아낼 만한 물건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신문을 보는 집도 흔하지 않았고, 종이 자체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집집마다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던 때였고, 지금처럼 화장지를 넉넉하게 사서 쓰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집에 생긴 종이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화장지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광고 전단지며 택배 상자며 종이가 넘쳐나지만, 그때는 종이 한 장도 그렇게 쓸모가 있었다. 그러니 학교에서 폐품을 모아 오라고 해도 헌 신문이나 종이를 한 아름씩 가져갈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폐품수집에서 가장 수월했던 것은 빈 병 이었다. 집 안팎을 둘러보다 빈 병이 있으면 챙겨두었다가 학교에 가져갔다. 요즘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이다. 지금은 버릴 것이 너무 많아서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 고민인데, 그때는 학교에서 폐품을 가져오...

그때는 왜 그랬을까? 2탄 —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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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보면 가끔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학교가 멀면 버스를 타기도 하고 부모님이 차로 데려다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가 멀어도 걸어 다니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학교에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꽤 먼 길이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이 모두 그렇게 학교에 다녔기 때문입니다. 아침이면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모였다 아침이 되면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하나둘 집을 나섰습니다. 누가 몇 시에 어디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학교 갈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동네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먼저 나온 아이가 길을 걷다가 다른 아이를 만나고, 조금 더 가면 또 다른 아이가 합류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동네 아이들이 함께 학교로 향했습니다. 혼자 걷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함께 걷다 보니 먼 학교까지 가는 길도 그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습니다. 책가방이 아니라 책보를 메고 다녔다 그 시절에는 지금 아이들이 메고 다니는 것 같은 책가방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모두 책보에 책과 공책을 싸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책보를 메는 모습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달랐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책보를 어깨에 메고 다녔고, 여자아이들은 책보를 허리에 둘러 메고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책보 하나에도 그 시절 아이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온 신작로가 아이들의 등굣길이었다 학교에 가는 길에 지금처럼 잘 만들어진 보행로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온 신작로가 우리들의 등굣길이었습니다. 아침이면 책보를 멘 아이들이 신작로를 따라 줄줄이 걸었습니다. 산을 넘기도 하고 물을 건너기도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에 가려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고 하면 아주 먼 옛날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

그때는 왜 그랬을까? 1탄 — 국민학교에서 건빵을 급식으로 주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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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 급식이라고 하면 밥과 국, 반찬이 담긴 식판부터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기억은 전혀 다릅니다. 내가 다닌 상옥국민학교에서는 급식으로 건빵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이상합니다. 군대 간식처럼 생각하기 쉬운 건빵을 왜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급식으로 나눠줬을까요?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학교 급식 오늘날 학교급식은 학교에서 한 끼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예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전쟁 이후에는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기 어려운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1952년 전국의 결식아동은 61만 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1953년에는 유니세프와 미국경제협조처 등의 지원으로 들어온 탈지분유가 어린이들에게 제공됐고, 이후에도 외국의 지원을 받은 곡물이 학교급식에 사용됐습니다. 1963년에는 원조받은 곡물로 만든 식빵을 초등학생들에게 배급했고, 1966년에는 급식 대상이 280만 명까지 확대됐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학교급식은 지금처럼 메뉴를 갖춘 한 끼 식사라기보다는 아이들의 부족한 영양과 끼니를 보충하는 성격이 강했던 것 입니다. 나는 왜 건빵을 받았을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는 급식으로 건빵을 나눠줬습니다. 당시에는 다른 지역의 학교에서 무엇을 급식으로 받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건빵을 주니 그저 국민학교 급식은 원래 그런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된 뒤 매스컴을 통해 당시 서울을 비롯한 큰 도시의 학교에서는 빵을 급식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광주에서도 빵 급식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때 처음 이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같은 시절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왜 어떤 학교에서는 빵을 먹고, 우리 학교에서는 건빵을 먹었을까? 내가 어린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이유였습니다. 일반 빵은 오래 보관하기 어렵고 운송 시간이 길어지면 변질될 가능성이 있지만, 건빵은 수분이 적어 상대적으로 오래 보관하고 ...

은행에 가지 않고도 송금과 계좌이체를 할 수 있게 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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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누군가에게 돈을 보내야 할 때 스마트폰을 꺼내 계좌번호를 입력하면 몇 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자주 송금하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찾아 금액을 입력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보내는 일이 지금처럼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은행 영업시간을 확인하고 직접 은행을 찾아가야 했고, 번호표를 뽑아 차례를 기다린 뒤 창구에서 업무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은행에 가지 않고도 돈을 보낼 수 있게 된 과정에는 은행 업무의 전산화와 통신망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돈을 보내려면 은행부터 찾아가야 했던 시절 은행 업무가 지금처럼 온라인으로 연결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돈을 보내려면 은행 창구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은행에 가면 송금이나 입금을 위한 종이에 계좌번호와 금액 등을 직접 적었습니다. 작성한 용지와 돈을 창구 직원에게 건네면 직원이 내용을 확인하고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은행이 붐비는 날에는 번호표를 들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점심시간이나 월말처럼 사람이 몰리는 시간에는 은행 안에 긴 줄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은행 영업시간이었습니다. 은행 문이 닫히기 전에 일을 보러 가야 했기 때문에 직장인들에게 은행 업무는 시간을 따로 내야 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은행 업무가 전산화되기 시작하다 은행들이 업무를 전산화하고 서로 연결된 금융망이 발전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은행 직원이 직접 확인하고 처리해야 했던 많은 업무를 컴퓨터 시스템이 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좌에 얼마가 있는지 확인하고, 한 계좌에서 금액을 차감하고 다른 계좌에 반영하는 과정도 전산망을 통해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돈을 보낼 때 실제 지폐가 은행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좌이체를 하면 금융시스템 안에서 각 계좌의 기록이 변경되고, 은행 간 거래도 정해진 금융망과 결제 절차를 통해 처리됩니다. 이런 금융 전산망이 갖춰지면서 송금은 점차 은행 창구에서만 할 수 있는...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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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열어보면 예전과 달리 현금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거나 편의점에서 작은 물건을 살 때도 카드를 사용하고, 요즘은 휴대전화만 있으면 결제할 수 있는 곳도 많습니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외출할 때 현금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현금을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현금이 꼭 필요했던 시절 과거에는 물건을 사고 대금을 지불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현금이었습니다. 월급을 현금 봉투로 받기도 했고, 필요한 돈을 찾으려면 은행 영업시간에 맞춰 직접 은행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현금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출하기 전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활 습관이었습니다. 멀리 여행을 가거나 큰돈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평소보다 많은 현금을 가지고 다녀야 했습니다. 돈을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할 위험도 지금보다 컸습니다. 처음부터 카드 사용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몇천 원짜리 물건 하나를 사면서 카드를 내밀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카드가 처음 보편화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분위기는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특히 작은 식당이나 동네 가게에서 적은 금액을 카드로 계산하려고 하면 괜히 사장님 눈치를 보게 되기도 했습니다. 카드로 결제하면 수수료가 나간다며 툴툴거리는 사장님들도 있었고, 그래서 손님도 적은 금액은 현금으로 계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지갑에 현금이 없어도 별다른 불편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지만, 이렇게 카드 한 장을 거리낌 없이 내밀 수 있는 생활이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은 아닙니다. 신용카드가 현금을 대신하기 시작하다 현금을 직접 주고받지 않는 생활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신용카드입니다. 카드를 이용하면 물건을 구입할 때 당장 현금을 건네지 않아도 됩니다. 카드사가 결제 과정에 참여하고, 이용자는 정해...

음반을 사던 시대에서 스트리밍까지, 음악 감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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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듣고 싶은 노래가 생각나면 스마트폰에서 제목을 검색하면 됩니다. 노래 한 곡을 듣기 위해 음반을 사거나 음악 파일을 컴퓨터에 저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음악을 듣는 방법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이 나오면 음반 가게를 찾아갔고, 구입한 음반을 집으로 가져와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이후 CD와 MP3가 등장했고, 스마트폰과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편화되면서 음악을 듣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음악을 재생하는 기계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음악을 사고, 보관하고, 찾아 듣는 방법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 음악을 들으려면 먼저 음반을 사야 했던 시절 예전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원하는 시간에 들으려면 대부분 음반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새 앨범이 발매되면 음반 가게를 찾아가 직접 구입했고, 어떤 음반을 살지 진열대를 둘러보는 것부터 음악을 즐기는 과정의 하나였습니다. 음반 한 장을 구입하면 자연스럽게 수록곡 전체를 듣게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타이틀곡 때문에 구입했지만 여러 번 듣다 보니 오히려 다른 수록곡을 더 좋아하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앨범 재킷이나 가사집을 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을 보고 가사를 읽으면서 노래를 듣는 것은 당시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음악 감상 방법이었습니다. 음악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뿐 아니라 직접 가지고 있는 물건이기도 했습니다. CD는 원하는 노래를 골라 듣기 쉽게 만들었다 CD가 널리 사용되면서 음악을 듣는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여러 곡이 한 장의 음반에 들어 있다는 점은 이전과 비슷했지만 원하는 트랙을 선택하기가 훨씬 편리했습니다. 예를 들어 5번 곡을 듣고 싶다면 플레이어에서 해당 트랙을 선택하면 됐습니다. CD 플레이어뿐 아니라 휴대용 CD 플레이어와 자동차 오디오 등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음악을 들으려면 CD라는 물리적인 매체가 필요했습니다. 좋아하...

필름카메라에서 스마트폰까지, 사진 찍는 방법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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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길을 걷다가 예쁜 풍경을 발견하면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습니다. 음식이 나오면 먹기 전에 사진부터 찍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찍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사진 한 장을 찍는 일도 지금처럼 가볍지 않았습니다. 필름 한 통에 찍을 수 있는 사진의 수가 정해져 있었고, 찍은 사진이 잘 나왔는지는 현상하기 전까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장면이나 여러 번 찍기보다는 정말 남기고 싶은 순간을 골라 셔터를 누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진을 찍는 기계가 달라지면서 우리가 사진을 대하는 방법도 함께 달라졌습니다. 한 장을 찍기 전에 먼저 생각하던 시절 필름카메라를 사용하던 시절에는 촬영할 수 있는 사진의 수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24장이나 36장짜리 필름을 넣었다면 그 안에서 사진을 나누어 찍어야 했습니다. 여행을 갔다고 해서 마음껏 수백 장씩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기 전에 사람들의 행동도 지금과 달랐습니다. 가족들이 자리를 잡고 서면 누군가 카메라를 들고 구도를 맞췄습니다. 눈을 감지는 않았는지, 다른 사람이 앞을 가리지는 않는지 확인하고 한 장을 찍었습니다. 잘 찍혔는지는 바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만큼 셔터 한 번에 신중했습니다. 사진 한 장이 지금보다 귀하게 느껴졌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행이 끝나도 사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여행에서 돌아왔다고 해서 바로 사진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내 사진관에 맡기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며칠 뒤 봉투에 담긴 사진을 받아보는 순간에야 여행 중 찍었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은 흔들려 있었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찍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어설프게 나온 사진도 그대로 앨범에 들어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사진까지 하나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가 기다리는 시간을 없애다 디지털카메라가 널리 사용되면서 사진을 ...

종이 지도에서 내비게이션까지, 길 찾기는 어떻게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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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처음 가는 곳이라도 주소나 상호만 알면 길을 찾는 일이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에 목적지를 입력하면 현재 위치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고, 자동차를 타고 있다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길을 안내해준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은 아니다. 한때 자동차 안에는 전국도로지도 한 권쯤 들어 있었고, 처음 가는 장소라면 상대방이 그려준 약도를 챙겨가기도 했다. 인터넷이 보급된 뒤에는 컴퓨터에서 지도를 찾아 종이에 출력해 들고 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자동차 안에 길을 직접 안내해주는 내비게이션이 등장했고, 이제는 그 역할까지 스마트폰이 대신하고 있다. 종이 지도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사용되던 여러 단계 가 있었다. 자동차 안에 지도책 한 권을 넣어두던 시절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운전자를 위한 도로지도도 익숙한 생활용품이 되었다. 커다란 종이를 접어놓은 지도뿐 아니라 책처럼 페이지를 넘겨보는 전국도로지도와 지역별 도로안내 책자도 많이 사용됐다. 장거리 여행을 떠나거나 처음 가는 지역으로 운전할 때 필요했기 때문에 자동차 수납공간이나 좌석 뒤편에 지도책을 넣어두는 경우도 많았다. 몇 년 동안 사용하다 보면 책 모서리가 닳고 자주 보는 페이지에는 접힌 흔적이 남기도 했다. 지금 자동차에서 지도책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 당시에는 자동차와 종이 지도가 꽤 오랫동안 함께 다녔던 셈이다. 처음 가는 장소에는 ‘약도’가 따라붙었다 종이 지도와 함께 자주 볼 수 있었던 것이 약도 였다. 결혼식 청첩장이나 돌잔치 초대장, 각종 행사 안내장에는 행사장을 찾아오는 길을 간단하게 그린 약도가 들어가곤 했다. 가게 명함이나 광고 전단에도 위치를 알려주는 작은 약도가 인쇄되어 있었다. 모든 도로를 자세히 그리는 대신 큰 사거리나 학교, 은행, 시장처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장소를 표시하고 목적지까지 이어지는 길을 굵은 선으로 그려놓았다. 주소만 알려주는 것보...

공중전화에서 휴대전화로, 연락하는 방법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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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누군가에게 연락할 때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전화번호를 누르거나 이름을 찾아 메시지를 보내면 된다. 집에 있든 밖에 있든 이동 중이든 크게 상관없다. 하지만 예전의 전화는 지금과 조금 다른 물건이었다. 전화는 사람에게 연결된 것이 아니라 장소에 놓여 있는 물건 에 가까웠다. 집에는 집 전화가 있었고, 회사에는 회사 전화가 있었다. 밖에서는 공중전화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전화기의 모양이 달라진 것보다 더 큰 변화는 따로 있었다. 연락이 장소를 찾아가는 일에서 사람을 찾아가는 일로 바뀐 것이다. 전화번호는 원래 사람보다 장소를 나타냈다 예전에는 한 집에 전화번호 하나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는 것은 사실 그 사람 개인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으로 전화를 거는 것 이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도 친구가 바로 받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여보세요?” 전혀 다른 가족이 전화를 받으면 “○○이 있나요?” 하고 바꿔달라고 해야 했다. 친구가 없으면 가족에게 전화가 왔었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회사도 비슷했다. 대표번호로 전화한 뒤 원하는 사람이나 부서를 찾아 연결받는 방식이 흔했다. 지금 생각하면 불편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락 방법이었다. 전화번호 역시 개인의 번호라기보다 집과 회사 같은 장소의 번호 라는 의미가 더 강했다. 집을 나서는 순간 연락할 방법이 크게 줄었다 집에 있을 때는 전화가 있었지만 문을 나서는 순간 상황이 달라졌다. 밖으로 나간 사람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 중 누군가 외출하면 어디로 갔는지, 몇 시쯤 돌아오는지를 미리 이야기해 두는 경우가 많았다. 예정보다 늦어지더라도 집에서는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반대로 밖에 있는 사람도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바로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외출에는 지금보다 훨씬 긴 ‘연락할 수 없는 시간’ 이 존재했다. 오늘날에는 휴대전...

동네 문방구에서 팔던 생활용품이 다양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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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문구점이라고 하면 공책이나 연필, 볼펜 같은 학용품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예전 동네 문방구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다른 풍경이 생각날 것이다. 문방구 안에는 학용품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건전지와 풀, 테이프 같은 물건부터 작은 장난감, 우산, 실내화, 양말, 머리핀처럼 당장 생활에 필요한 물건까지 함께 진열돼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게 규모는 크지 않았는데 물건 종류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했다. 왜 예전 문방구에서는 이렇게 많은 생활용품을 함께 팔았을까? 문방구는 학생만 이용하는 가게가 아니었다 문방구의 가장 중요한 손님은 물론 학생들이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는 공책, 연필, 지우개, 자, 색종이 같은 학용품이 가득했다. 준비물을 깜빡한 학생들이 등교 전에 급하게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택가에 있던 동네 문방구는 조금 달랐다. 학생뿐 아니라 부모와 동네 주민들도 자주 찾았다. 집에서 갑자기 필요한 작은 물건이 생겼을 때 멀리까지 가지 않고 살 수 있는 가까운 가게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방구에서는 자연스럽게 주민들이 자주 찾는 물건도 함께 판매하게 됐다. 지금처럼 대형마트가 가까운 곳에 많지 않았다 현재는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대형마트나 편의점, 생활용품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온라인으로 주문해 집에서 받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과거에는 지금과 같은 소비 환경이 아니었다. 대형마트가 지금처럼 곳곳에 자리 잡기 전에는 생활에 필요한 작은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시장이나 상가까지 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동네 곳곳에 있던 작은 가게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문방구 역시 그중 하나였다. 공책을 사러 갔다가 건전지를 사고, 아이 준비물을 사러 갔다가 테이프나 작은 생활용품을 함께 사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소량으로 필요한 물건을 사기에 편리했다 생활하다 보면 거창한 장보기가 아니라 물건 하나만 급하게 필요한 순간이 있다. 테이프가 떨어지거나 건전지가 필요할 수도 있고, 아이가 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 시간을 신문에서 찾아보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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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보고 싶은 방송이 있으면 휴대전화로 검색하면 된다. 방송 시간을 놓쳤더라도 다시보기로 볼 수 있고, 원하는 장면만 골라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예전에는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먼저 몇 시에 방송하는지 알아두는 것 이 중요했다. 그 시간을 놓치면 다시 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 배달된 신문을 펼치면 뉴스 기사보다 먼저 오늘의 TV 편성표를 찾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힌 방송국별 프로그램 이름과 시간을 훑어보다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발견하면 그 시간을 기억해두곤 했다. 신문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TV 편성표 예전 신문에는 방송국별 TV 프로그램과 방송 시간이 정리된 편성표가 실렸다. 아침부터 밤까지 어떤 프로그램이 방송되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TV 편성표 앱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보고 싶은 드라마가 몇 시에 시작하는지, 주말 영화는 무엇을 해주는지, 스포츠 중계가 있는 날은 몇 시부터인지 신문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 먼저 신문을 보고는 “오늘 저녁에 영화 한다”거나 “드라마 오늘 하는 날이다”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지금처럼 방송 시작을 휴대전화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결국 사람이 기억해야 했다. 방송 시간에 맞춰 하루 일정을 맞추기도 했다 인기 있는 드라마나 특별한 방송이 있는 날에는 저녁 시간의 분위기가 달라지기도 했다. 저녁을 조금 일찍 먹거나 하던 일을 서둘러 끝내고 방송 시작 전에 TV 앞에 앉았다. 프로그램이 시작한 뒤에 집에 들어오면 앞부분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녹화할 수 있는 기기가 없는 집이라면 이미 지나간 장면을 다시 볼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빨리 와, 시작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곤 했다. 특히 마지막 회나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이라면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더 신경을 썼다. 채널 선택권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지금은 채널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볼지 고르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정도다...